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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회지 정보

- 차례 -

1. 인도(India)는 어떤 나라인가?

2. 인도(India)의 역사
3. 인도(India)의 종교
4. 인도(India)의 기독교 선교 Report
5. 인도(India) 관련 사이트

3. 인도의 종교

(3-2) 이슬람교

인도 최대의 소수파인 이슬람교는, 같은 나라에서 종교의 이유로 갈린 파키스탄과 인도와의 관계가 좋지 않듯 현재 인도내에서도 주류인 힌두교도들과 그다지 사이가 좋지만은 않은 집단들이다. AD590년 현재 사우디 아라비아 땅인 메카에서 태어난 마호메트에 의해 창시된 회교는 우리가 세계사 시간에 배우듯 '한손엔 칼, 한손엔 코란'이라는 말로 유명한 종교이다. 물론 이런 말들은 이슬람권과 대립하던 기독교권이 만들어낸 말이기는 하지만 말이다. 하지만 여하튼 회교가 그다지 개방적이거나 관용적인 종교는 아니다.

1001년 마흐무드의 인도침입으로 시작된 이슬람세력의 인도침입은 결국 1527년 무굴제국이 성립되면서 최정점에 이르는데, 이 500여년 간의 이슬람세력과의 대립(대부분 힌두들이 엄청 깨진....)과 이슬람 지배자들의 포교 정책에도 불구하고 회교 인구가 아직까지도 소수인 것은 특기할만한 사항이다. 무굴제국이 망하고 그 자리를 영국이 차지하게 되면서 끊임없는 종교간의 분리 대립정책을 구사했는데, 오늘날과 같은 극단적 대립의 시초는 이 영국시절에 만들어진 것이다. 독립후 결국 나라는 힌두국가인 인도와 이슬람국인 파키스탄으로 나뉘게 되었는데, 이 분할 과정에서 현재 분쟁지역이 카쉬미르 사태의 시원이 되고 만다. 당시 인도와 파키스탄 분할의 기준은 해당지역 종교당 인구비례였는데, 카쉬미르 지역은 주민의 대다수가 회교신자 였음에도 불구하고 문제는 카쉬미르 주민쪽으로 가지 않았다. 당시 카쉬미르는 영국땅이 아닌 독립된 왕국이었는데, 카쉬미르의 마하라자(왕) 은 힌두였다. 결국 그는 인도,파키스탄의 독립과정에서 대다수 주민의 바램을 무시하고 인도를 선택하였다. 이런 저런 종교갈등이 복합적으로 터지게 된 것이 요즘에도 시끌시끌한 카쉬미르 지역의 분쟁이다. 실제로 카쉬미르에 가서 그곳 사람들과 얘기를 하다 보면 처음에는 조심스럽지만, 결국 그들의 얘기는 우리는 인도보다는 파키스탄과 가깝다는 것이다. 인도가 누리고 싶어하는 남아시아의 패권에 죽어나는 것은 소수파이고, 소수민족들일뿐이다.

회교는 수많은 남자들이 열광하듯 일부다처제이고(실제로 일부다처를 누리는 사람은 극소수이고, 오히려 있는 사람들이 여자들을 싹 쓸어간 관계로 장가못간 남자들이 많다. 이런 여자의 부족은 이슬람 권에서의 광범위한 동성애 관행을 낳았다.) 돼지고기를 제외한 모든 육류를 섭취할수 있다. (단 이들의 제사방식인 '할랄'이라는 의식을 치르고 잡은 고기여야 한다.) 이런 이유로 인도를 여행하면서 고기가 먹고싶을때는 회교도 구역에 가면 가장 값싸게 먹을수 있다. 힌두가 개종이 안되고, 태어나지는 것이 비해 이슬람은 개종을 할수 있는데, 이슬람을 믿기 위해서는 다섯가지의 계율을 지켜야 한다. 이슬람들은 이를 다섯기둥이라 표현하는데, 첫째 기둥은 샤하다(Shahada), 즉 증언이라는 신앙 고백으로 '마호메트는 알라의 사도이다'라고 언표하는 것이다. 두번째 기둥은 기도이다. 여기는 두개의 규칙이 있는데 하나는 규칙이나 의례에 얽메이지 않은 기도이고 또 하나는 살라트(Salat) 라고 하는 새벽,정오,오후,저녁,밤중에 하는 규칙적인 기도를 의미한다. 집단기도는 그들의 휴일인 금요일 정오, 모스크에서 이루어진다. 세번째 기둥은 하찌(Haji)라 하여 성지순례이다. 모든 무슬림은 메카에서 베디나로 이주한 예언자 마호메트의 행적을 따라 생애의 한번은 이 두개의 성스러운 도시에 발문해야 한다. 네번째의 기둥은 사움(Sawm), 금식이다. 무슬림 달력에서 아홉번째의 달에 행하는 라마단 금식인데, 노약자를 제외한 모든 성인 남녀가 참여하도록 되어있다. 라마단 한달동안 신자들은 해뜰때부터 해질때까지 음식과 음료수, 그리고 성관계(이것도 음식?)를 멀리해야 하며, 밤마다 특별한 기도를 드린다. 마지막 기둥인 다섯번째는 자카트(Zakat)라고 하는 기부이다. 원래는 소수자들을 위한 자발적 기부의 형태에서 후대로 오면은 국가의 권위를 인정했음을 뜻하는 공남이나 세금의 일종으로 받아들여지게 되었다

More Information : http://jmiuubf.kimc.net/
인도 무슬림(M. Mujeeb 교수님의 The Indian Muslims에서)
인도 무슬림의 역사 - 무갈문화 탄생의 배경(초기 6황제를 중심으로)
무슬림의 유머-악바르와 비르발

(3-3) 불 교

대부분의 사람들이 인도하면 떠올리는 이미지는 불교일 것이다. 그도 그럴것이 인도는 불교의 발생지이고, 불교의 개조인 붓다는 인도인이기 때문이다. 한국을 위시한 많은 아시아 국가들에 불교가 차지했던 위상을 본다면 당연한 것이지만, 막상 발생지인 인도에서 현재 불교신자는 600~700만 사이이다. 10억의 인구에 비해 1%의 비중도 차지하지 못한 것이다. 물론 인도에서도 불교가 번성했던 시기가 있었다. 우리가 잘아는 아쇼카 왕대의 마우리아 왕조는 불교가 국교였던 시기였고 우리 한국인들이 인도를 여행하면서 그나마 이질적이지 않게 접하는(힌두교에 비해) 대부분의 인도유적은 불적지들이다. 하지만 현재의 인도는 각 불교성지들도 외국인 신도들과 외국계의 절이 판을 치고 있을 뿐 자생적인 인도인 신도들은 손으로 꼽을수 밖에 없는게 현실이다.

인도에서 불교가 사라지게 된 원인에 대하려 수많은 학자들이 많은 설을 제시하는데, 그중 가장 유력한 것은 불교와 힌두교의 차이가 사라지면서 힌두교에 흡수가 되었다는 주장이다. 이 주장의 근거 중 하나가 불교의 창시자인 붓다가 히눋교 3신중 하나인 비슈뉴의 화신으로 영입(?) 된 것을 꼽고 있다. 힌두교에 대한 반동으로 등장한 불교의 초기 모습은 모든것이 힌두교와는 반대였었다. 카스트를 인정하는 힌두교에 비해 불교는 카스트 자체를 부정했고, 수많은 신들이 존재했던 힌두교에 비해, 불교는 시조인 붓다 역시 자신을 경배하거나 자신을 닮은 신상조차 만들지 말라는 엄명으로, 오히려 무신론에 가까운 모습을 띄었던 것이다. 종교 초기 시조의 열정적인 활동으로 교세를 넓힌 불교는 붓다 사후 수세기를 지나면서 처음의 생명력을 점점 잃게 되었다. 초기 카스트 제도에 대한 반발로 많은 대중들의 지지를 받았었으나, 불교역시 이후 기독교가 권력을 잡으면서 대중과 멀어지듯, 권력을 잡고, 왕들의 우산속에 들어가면서 초기의 신랄한 비판정신을 대부분 잃어 버리게 되었다. 대중들은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을 믿지 않는다고 했던가? 불교도들은 포교라는 이유로 급기야의 불상이라는 것까지 만들게 된다. 이런식으로 불교의 종교화를 주장했던 세력들이 독자적인 종단을 만드는데, 이들이 후대 대승불교, 혹은 북방불교라고 부르는 종파들이다. 이후 북방불교의 출현으로 당시에는 다시 대중들의 지지를 획득하는데 성공했으나 장기적으로 본다면, 수많은 힌두교신들의 영입(?) 붓다의 신격화, 붓다를 중심으로한 수많은 신비한 전설, 전승의 창조들로 긍국적으로 인도인들이 보기에는 힌두교와 별 다르지 않은 그저 비슷비슷한 부류로 인식이 되었고, 이것은 인도내에서 불교가 생명력을 유지하는데 치명적이었다. 설상가상으로 인도로 들어온 이슬람 세력들로 인해 근거지였던 인도 북부지역이 초토화 되면서 자연스레 불교는 인도 역사에서 사라지게 된 것이다.

현대 인도 불교의 중흥은 인도 초대 법무장관을 지낸 암베드 카르에 의해서인데, 엄밀히 말한다면 종교운동이라기 보다는 하층민들의 정치적인 운동으로 보아야 할 현재 불교의 중흥으로 인해 그나마의 불교 신자수를 인도는 가지게 되었다.

(3-4) 자이나교

한국인에게는 생소한 종교가 자이나교인데, 그것은 외국인들에게도 그랬던 것 같다. 막스뮐러 이후 인도학 초기에 가장 첨예한 논쟁중에 하나가 붓다와 자이나교의 창시자인 마하비르가 동일인물이 아니냐는 논쟁이었다. 거의 비슷한 시기에, 같은 지역(비하르주) 에서 거의 비슷한 주장을 했던 이 두 선각자들이 서로 만났는지의 여부를 확인할 길은 없으나 양쪽 초기 경전을 보면은 당대의 유력한 부호나 왕 들이 모두다 자기의 후원자라고 주장하고 있다.(이것이 중요한 문제라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는데 이 것은 결코 중요하지않은 문제이다. 어차피 당대의 왕이나 부호들도 불교나 자이나교를 믿고 싶은 생각은 별로 없었다. 그거 커다란 승단조직을 자기들에게 유리한 세력으로 만들기 위해 양쪽 어디든 접촉했다는 의미일테니까......) 시조인 마하비르는 지금 비하르주의 바이샬리(불교의 2차 결집지로 이 지역은 불교도들의 성지이기도 하다.)에서 태어났는데, 그의 수행생활 이라는 것이 극단적 고행과 무소유를 지향하는 것이어서, 옷도입지 않고, 구걸에 필요한 식기조차 휴대하지 않는 것으로 유명했다고 한다. 결국 그는 이 극단적인 12년간의 고행끝에 깨달음을 얻게 되었는데, 이후 30여년간 세상에 더 머무르며 자신의 깨달음을 전파했다. 현재의 자이나교는 크게 두 파로 나뉘는데, 하나는 교조의 뜻을 이어받아 나체수행을 하는 집단이다. 여행자들이 자이나교의 나체수행자들을 접하기란 쉬운일이 아닌데, 때때로 엘로라의 동굴군에 나체수행자들이 나타나 한번씩 스치듯 볼수있는 기회를 제공하곤 한다. 현재 자인교가 가장 번성한 곳은 구자라트 주로 이곳의 빨리타나, 마운트아부, 우다이뿌르, 그리고 2001년 지진으로 완전히 부서진 부즈 지역의 자이나교 유산이 대표적이다.(이제 부즈지역의 그 아름다운 사원은 사진속에서나 볼수 있지 싶다.)


(3-5) 시크교

14세기 중반에이르면 11세기 이후로 계속 되었든 이슬람의 인도 침입이 절정에 달하고있던 때였다. 양측이 서로 종교의 이름으로 죽고, 죽이기를 몇 세기를 이어내려 오면서 대립도 했지만, 나름대로 이슬람은 힌두교에서 신비주의적인 경향을, 힌두는 이슬람으로부터 종단 조직에 대한 것들을 주고 받으면서 발전한 경향도 없지 않아 있는데, 시크교의 창시자인 구루나낙은 여기서 한걸음 더 나아가 결국 가다 보면 이슬람이니 힌두니 하는 구분 조차 필요 없다고 역설한다.

이 새로운 비젼으로 그는 3차례의 순례여행을 떠나는데, 그의 뜻에 맞는 사람들이 모여 종교조직을 이룬것이 시크교의 시작이다. 하지만 이슬람제국인 무굴제국이 성립되고, 무굴의 지배자들과는 때로는 협력적으로 우호관계를 맺기도 하고 또 황제에 따라 대립 하기도 했었는데, 17세기 구루 하르고빈대에 이르러서는 무굴의 군사력에 대항하기 위한 상시적인 무장군을 운영하기에 이른다. 이후 그의 뒤를 이은 두명의 구루들역시 무굴과의 대립과정에서 죽으면서 10대 구루에 이어서는 법통마저 끊기게 된다. 암리차르에 있는 시크교 사원인 황금사원은 이들의 정신적 지주나 다름없는 곳으로 여행자들에게는 그저 공짜로 먹여주고, 재워주는 인심좋은 사원일 뿐이다.

무굴이 망하고 영국이 들어오면서도 이네들의 신앙공동체는 계속 시련을 겪었는데, 세포이 항쟁당시 영국측 입장에 섰던 관계로 민족 반역자가 되기도 하고, 독립이후에는 시크교의 주 무대인 펀잡주가 파키스탄과 인도에 양분되는 사태에도 이르게 된다. 가장 최근인 인디라 간디 수상대에는 분리 독립을 주장하는 세력이 암릿차르 황금사원을 점거했고, 인디라 간디는 성스러운 사원에 탱크를 몰고 가는 만행을 저지르게 된다. 결국 몇달후 인디라 간디는 자신의 경호원이던 시크교도에 의해 암살되게 되고, 이 사건 직후 성난 힌두교도들에 의해 수많은 시크교도 들이 학살당하게 된다. (이들은 터반이라는 외형적 특징 때문에 숨길수가 없다. 이 학살극을 계기로 터반을 하지 않는 시크교도 들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수많은 시기마다 정치적 희생양이 되어버린 그들은 인도인들에 비해 덩치나 외모가 큼직하기만 한데, 이런 이유로 군대나 경찰쪽에서는 상당 비중을 차지하기도 한다.

(3-6) 배화교

조로아스터교라는 이름을 들으면 우리에게 무척 생소한 이름이지만, 또 다른 이명인 배화교라고 하면은 소시적 무협지께나 읽은 사람들은 기억이 날지도 모른다. 한때 엄청난 붐이어었던 영웅문3부만 봐도 명교라는것이 나오고 이것이 후일 명태조 주원장의 기반세력 이 되는데, 이 명교역시 배화교의 또 다른 이름이다. 이 조로아스터교는 인도가 원산지(?)가 아니라 고대 페르시아(현재의 이란)의 국교였다. 현재 인도민족을 아리아인의 후예라고하는데, 이란의 페르시아족 역시 아리아인의 한 갈래이다. 인도인들이 아주 종교적인 민족이듯이, 이란 역시 한 종교 한다는데에는 둘째가면 서러운 사람들이다. 그것은 현재 탈레반과 함께 몇안되는 신정일치의 정치구조를 가진 나라라는 것역시 이를 반증한다. 같은 아리아 인들인 이들의 고대 경전, 즉 조로아스터교의 아베스타와 힌두교 최고 경전인 리그베다 사이의 유사성은 이들을 더욱더 가깝게 한다.

조로아스터교의 창시자는 짜라투르스타(가 영어식 표기고, 원래발음은 조로아스터) 인데, 그 역시 30까지 고행으로 일관하다 깨달음을 얻은후 77세가 될때까지 가르침을 폈다는 것이다. 이들의 경전인 아베스타와 베다의 유사성만큼이나 또 많은 차이가 있는데, 그중 대표적인 것인 조로아스터교는 세계최초의 이원론종교이고 유일신교라는 것이다. 이원론이란것은 요즘의 기독교계열 혹은 이슬람계열에서 보이는 모습으로 선과 악의 대립, 혹은 신과 악마의 대립등, 이분법적 세계관에 기초한 것인데, 이런 이원론은 힌두교의 그것과는 상당한 차이를 보인다. 그리고 다신교적 성격이 강한 힌두교에 비해 유일신교라는 것도 차이라면 차이일 것이다. 배화교라는 글자와 어울리게 이들은 불을 신성시여기는 것으로도 유명하다.
후일 유대교의 유일신개념이나 불에 대한 신성성(이것은 구약시대를 통괄하며 신에 대한 제물을 바치는 희생제인 번제와 이에 대한 신의 응답의 상징으로써의 '불'의 등장으로 표현된다.)은 조로아스터교의 영향으로 받아들여지는데, 결국 유대교의 뿌리를둔 현대의 예수교나 이슬람교 역시 조로아스터교의 산물이라 할수있다.
정말 무서운 아리아인들이다. 이런식으로 따지면 그들의 손을 거치지 않은 종교란 손에 꼽을만큼 드물어진다.
힌두교, 조로아스터교,불교,예수교,이슬람교,시크교,자이나교..........현재 인도의 조로아스터교인들은 본국에서 이슬람세력의 박해를 피해 구자라트의 마하라자에게 거주할곳을얻어 정착하게 되면서 인도에 뿌리를 내리게 되었는데, 현재는 뭄바이의 7만명가량을 포함해, 인도전체 10만명의 신도를 거느리는 세계 최대의 조로아스터집단이 되었다.
이들의 독특한 장례풍습역시 유명한데, 조장이라 불리는 이 장례법은 사람이 죽으면 철망이 있는 탑위에 시체를 걸어놓고 새들이 쪼아먹어서 남은 뼈들이 아래에 떨어지게 해서 장례를 치르는 것이다.
조로아스터교인들은 이교도와의 결혼을 금지하고 있는 관계로 그 수가 점점 줄어드는 추세이다.

(3-7) 기독교

1498년포루투갈의 바스코다 가마가 캘리컷에 도착한 직후를 인도 기독교의 기원으로 보기도 하나 AD52년 예수의 12대 제자중하나였던 도마(토마스)의 인도선교를 기원으로 삼기도한다. 종교가 무지 많은 나라 답게 인도의 기독교는 우리가 흔히 접하는 개신교와 캐톨릭을 제외하고도, 시리아정교,그리스정교같은 우리가 쉽게 접하기 못하는 기독교일파들도 일정세력이 인도에 자리를 잡았다. 최근까지 포루투갈 하에 있던 고아주나, 께라라지역은 인도내에서도 기독교의 비중이 높은 지역중의 하나이다. 이 남부 직역은 전반적으로 캐톨릭의세력이 강한 편이고, 요즘들어 급격히 기독교로의 개종이 이루어지는 동북부의 미조람이니 나갈랜드니 하는 곳은 개신교의 세력이 강한편이다. (그중에서도 한국 사람들.....)

요즘들어 특히 인도남부를 여행다 보면 한국인 선교사들을 볼수가 있는데, 요즘들어 불고있는 한국 교회 인도선교의 한 단면이라 할 수 있다. 남부 께랄라주의 코친에는 유대교의 흔적도 볼수 있는데, 시나고규라 하는 유대교 특유의 사원이 존재하고 있다.

<Source 12> : 인도환타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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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ily Bible

백부장과 및 함께 예수를 지키던 자들이 지진과 그 되는 일들을 보고 심히 두려워하여 가로되 이는 진실로 하나님의 아들이었도 다 하더라
마  27:54

읽을 말씀 : 열왕기하 16, 17장
관련 찬송 : 377, 379장
묵상 말씀 : 왕하16:10 ~ 16:16

본문에는 아람과 이스라엘 연합군의 침공으로 궁지에 몰린 아하스의 앗수르 원조 요청 과정에서 발생한 악의적인 종교적 변형이 구체적으로 기술되어 있습니다. 아하스는 성전의 모형과 제사 의식을 이방 앗수르의 종교적인 형식에 맞춰 자신의 임의대로 변조시킴으로써 하나님의 말씀에 정면으로 도전하는 죄악의 장본인이 되었습니다.  

- 우리의 신앙이 타락할 때 -

오늘의 적용
* 나는 하나님의 말씀을 먼저 듣는가, 아니면 사람의 말을 먼저 듣는가?
* 각자 오늘 순종해야 할 하나님의 음성이 무엇인지 서로 나누어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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